여행은 총 세 번 하는 것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한 번쯤 들어봤을 말이다. 여행지로 떠나기 전 여행 계획을 짜면서 한번. 낯선 곳에서 여행하면서 한번. 마지막으로 다녀온 뒤 사진과 글을 정리하면서 한번. 이렇게 총 세 번 여행을 한다.

 

작년 무뚝뚝한 아버지와 200일간 세계 일주를 다녀온 정재인 씨는 지금 세 번째 여행 중이다. 세계여행 중 아버지와 찍었던 사진과 매일 저녁 썼던 일기를 모아 <대략난감, 꼰대 아버지와 지구 한 바퀴>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또 여행하면서 아버지와 느꼈던 경험들을 매체를 통해 여러 사람과 나누며 부모와 자녀의 관계회복에 도전을 주고 있다. 세 번째 여행을 하고 있던 그에게 요즘 좋은 소식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를 만나고 왔다.

약속 당일 그는 한 젊은 여성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분위기가 좋아 보였다. 그때 짐작을 했다. 좋은 소식이 이거구나. 옆에 계신 분이 오랜 이상형인 인어공주냐는 질문에 그는 해맑게 웃는다.

 

아버지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인어공주 동상을 보면서 이상형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어요. 이상형이 속 깊고 따뜻한 여자였는데, 지금 제 옆에 앉아 있네요. (웃음) 얼마 전 상견례도 했는데 아버지께서 무척이나 좋아하셨어요. 무뚝뚝한 아버지인데 그날따라 좋다는 표현을 많이 해주셨어요. 여행에서도 보기 힘들었던 모습인데. (웃음)”

 

그의 아버지 정준일 씨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다. 그는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34년 동안 오로지 일만 했다. 자식들을 먹여 살리는 일이 자신의 가장 중요한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족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법은 몰랐다. 그에게는 따뜻한 대화보단 차가운 명령이 먼저였고, 어려운 타이름보단 쉬운 체벌이 먼저였다.

 

어릴 때 아버지와 대화한 기억이 거의 없어요. 제가 무슨 말을 하면 항상 호통을 치셨고, 듣지를 않으셨어요. 아버지께 할 말이 있으면 어머니를 통해서 했어요. 어머니가 저와 아버지의 매개체였죠. (웃음) 당연히 아버지와 함께한 추억도 없어요. 초등학교 때 부모님과 통도환타지아에 놀러 간 거? 그게 전부에요. 매일 바쁘다는 핑계를 대셨고, 가족에게 늘 무관심하셨죠. 그게 가장 싫었어요.”

 

평소에 아들과 거의 대화가 없던 정준일 씨는 아들 정재인 씨에게 뜻밖의 제안을 한다. 세계 여행을 함께 떠나자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정재인 씨의 첫 반응은 황당함이었다. 그동안 알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농담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때 저는 27사단 259포병 대대에서 포병장교로 군 복무 중이었어요. 전역을 3개월 남겨두고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죠. 그때 제 나이가 스물여덟이었어요. 나가서 바로 취업을 한다고 해도 늦은 나이라서 아버지께는 한번 생각해본다고 했어요.”

 

정재인 씨는 아버지와 통화 후, 한 달 동안 고민을 했다. 취업 문제는 둘째 치고, 어색한 아버지와 함께 비행기를 타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숙소를 쓰고, 모든 것을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를 힘들게 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술자리에서 대학 후배와 대화를 통해 아버지와의 세계여행을 결심했다.

 

오랜만에 만난 대학 후배와 술자리에서 이야기하는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어요. 후배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거예요. 그때 제 아버지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더라고요. 그다음 날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어요. 세계여행 같이 가겠다고 말씀드렸죠.”

 

죽음은 우리를 삶의 본질 앞에 데려다 놓는다.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지. 행복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버지 정준일 씨도 오랜 친구의 죽음을 직접 눈으로 본 뒤, 앞으로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아버지의 오랜 친구가 암으로 일찍 돌아가셨어요. 아버지께서 친구의 죽음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셨어요. 그동안 좋아하는 취미 하나 없이 일만 해왔던 자신의 삶에 대해서 회의감을 느끼신 것 같아요. 그때 속으로만 간직해 왔던 세계여행에 대한 꿈을 저에게 말씀하신 것 같아요.”

 

그렇게 무뚝뚝한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여행은 시작되었다. 30년 가까이 대화 없이 지내온 두 사람이 세계 여행을 계기로 하루아침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기적이다. 불행히도 두 사람에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울산에서 KTX를 타고 서울로 출발할 때부터 두 남자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한국을 떠나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까지 계속 이어졌다.

 

막상 세계여행을 간다고 아버지와 기차를 탔는데, 할 말이 없더라고요. (웃음) 30년 가까이 대화다운 대화를 해본 적이 없으니, 처음에 아버지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기껏해야, 점심 뭐 드실래요?, 어디 가고 싶으세요? 같은 질문이 전부였어요.”

 

두 사람 사이 얼어붙은 침묵은 터키의 파묵칼레 온천에서 눈 녹듯 사라졌다. 정재인 씨는 활처럼 굽어 버린 아버지의 딱딱한 등을 말없이 밀었다. 그때 아버지 정준일 씨가 처음으로 아들 정준일 씨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아버지와 그렇게 오래 대화한 적은 처음이에요. 그날 아버지께서 당신의 가정사, 자라온 환경에 관해서 이야기해주셨어요. 어릴 때부터 형들 기에 눌려 눈치를 보며 사셨고,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삶을 사셨다는 것을 그때 처음 들었어요. 자식들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 엄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도 해주셨고요. 아버지의 살아온 이야기를 들으니 그동안 아버지의 행동들이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어요.”

 

터키 파묵칼레 온천은 두 남자의 관계를 더욱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그 후 아버지와 대화는 자연스러워졌다. 아버지의 대화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명령과 다그침뿐이던 아버지의 대화법이 아들의 말을 들어주고 인정해 주는 대화법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 전에는 잔소리가 심하셨어요. 여행지에 와서도 음식 남기지 마라, 양치해라, 일찍 자라 잔소리를 하시며 항상 저를 어린아이 취급하셨죠. 터키 파묵칼레에서 온천을 하면서 제 생각들을 다 말씀드렸어요. 저도 이제 어른이고, 제 나름의 생각과 생활 방식이 있다고 이야길 했죠. 근데 아버지는 그 잔소리가 저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하셨어요. 혹여나 제가 잘못될까 봐 걱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잔소리였던 거죠. 감사하게도 아버지께서 제 이야기를 들으시고 표현 방법을 바꾸어 보겠다고 말씀하셨어요. 그 후로 아버지와 대화다운 대화를 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미국의 사회학자 다니엘 벨은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사실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 정준일 씨에게 그 말은 유효하지 않다. 그에게는 절대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를 여행할 때 아버지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을까요?” 라고 지나가는 말로 물었어요. 그때 아버지께서 네가 내 아들인 것은 변하지 않아라고 대답하시더라고요. 아버지께서 무심한 듯 툭 던진 말인데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 멍했어요. 아버지께서 나를 이렇게까지 생각하신다는 사실에 눈가가 뜨거워지더라고요.”

 

아버지와 세계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정재인 씨는 원하는 직장을 얻어 분주한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아버지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고 고백했다. 여행 중, 아버지께서 했던 말들이 전에는 머리로 이해했다면, 지금은 온몸으로 깨닫고 있다고.

 

직장생활을 할수록 아버지가 더 존경스러워져요. 이제는 내가 아버지처럼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요. 아마 쉽지 않을 것 같아요.”

 

벚꽃 흩날리는 5. 그는 한 여자의 남자가 된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한 아이의 아버지도 될 것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미래에 태어날 자녀를 어떻게 키울지, 어떤 아버지가 될지 고민하고 있다.

 

자녀의 말을 잘 들어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요. 제 생각을 무조건 강요하기보다는 아이의 생각을 먼저 들어주고 공감해줄 거예요. 또 제 아버지가 저에게 여행을 권유하셨던 것처럼 저도 자녀와 자주 여행을 가고 싶어요. 꼭 세계 여행이 아니더라도 함께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려고요.”

 

정재인 씨와 헤어지고 돌아오는 길에 <어린 왕자>에서 사막여우가 한 말이 생각이 났다.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것은 그 꽃을 위해 네가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우리가 부모님, 자녀와 함께 만든 추억과 시간이 서로를 더욱 소중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닐까? 만물이 생기를 되찾는 소생의 계절 3. 부모와 자녀 사이 하얗게 얼어붙은 관계위에 한 송이 붉은 장미꽃이 피어나길 기대한다.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자신이 이 과정에서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가 <선악의 저편>에서 한 말이다. 그의 말처럼 모든 사람은 삶의 전쟁터에서 자신의 괴물과 싸운다. 하지만 괴물과 싸워 승리한 후의 삶을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수십 년 동안 부모님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았는데, 정작 복수를 하고 나니 삶의 이유를 잃고, 술로 세월을 보내는 한 무협영화 주인공의 이야기도 이와 같다.

 

어릴 때부터 수많은 괴물과 싸워온 청년이 있다. 성악가 최성봉. 그는 세 살 때 부모에게 버림을 받았다. 그 후 20년 넘게 소외, 구타, 억압은 그를 괴물처럼 따라다녔다. 언어보다 욕을 먼저 배웠으며 생존을 위해 껌 파는 법을 배워야 했다.

2011, 칠흑같이 어두웠던 그의 인생에 한 줄기 빛이 내렸다. 그의 스승이었던 팝페라 가수 박정소의 권유로 그는 코리아 갓 탤런트에서 <넬라 판타지아>를 불렀다. 그의 이야기는 전 세계 사람들을 감동에 빠뜨렸다. 그는 세계를 무대로 희망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5년이 지났다. 그는 지금 어떤 삶을 살아내고 있을까? 강남의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어린 시절은 어떠했나.

색깔로 치면 어린 시절은 온통 검붉은 색이다. 유흥가 화장실, 길바닥이 내 집이었다. 10년 넘게 어른들에게 껌을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때 만났던 사람들은 조폭, 양아치, 알코올 중독자들이다. 사람을 증오했고 내 인생을 저주하며 산 것이 유년 시절 기억의 전부다. 네온사인, , 물건 부서지는 소리. 이런 것들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아있다.

 

지금은 많이 행복해 보인다.

표정을 밝게 하려고 많이 노력한다. 어두운 마음을 내비치면 사람들이 거리를 두더라. 물론 어릴 때보다 지금이 행복하다. 하지만 유년시절 기억이 여전히 내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 때문에 가끔 힘들다. 그동안 살아온 시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최근에 행정자치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작년 9월에 강남구청의 한 담당자가 나를 찾아왔다. 어떤 시민이 나를 국민추천포상 후보로 추천했다고 하더라. 담당하시는 분께서 몇 번 왔다 갔다 하시면서 조사를 하고 가셨다. 그리고 몇 주 뒤에 국민추천포상 포상자로 선정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어떤 상인가.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도움을 주고 따뜻한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를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나 말고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내가 받게 되어서 과분하게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을 통해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에게 후원도 하고, 때로는 직접 찾아가서 아이들과 이야기도 한다. 가끔 재단에 속하지 못한 친구들한테서 연락이 오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직접 찾아가서 고민을 들어주기도 하고 물질적으로 도와주기도 한다.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나.

먼저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목표가 없는 친구들에게는 목표를 심어주고, 사람이 필요한 친구들에게는 사람을 소개해준다. 돈이 필요한 친구들에게는 일정 금액을 생활비로 주기도 한다.

 

아이들로부터 감사편지가 많이 올 것 같다.

그런 것도 있지만, 오히려 내가 봉사활동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아이들은 주로 나에게 어려움 가운데서 어떻게 중심을 잡고 걸어 왔어요?”라는 질문을 많이 한다. 부모 밑에서 어리광을 부리고 사랑받을 나이에 인생에 대해 고민을 하고 생존에 대해 고민을 한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더 열심히 삶을 살아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아이들에게는 말보다 직접 삶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아이들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물질적인 후원도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관심인 것 같다.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게 해주는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은 닫힌 마음 문을 열고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앞으로 계획은.

사람들과 관계에 있어서 조금 더 유연해 지고 싶다. 사람들은 가끔 나에게 이런 질문을 한다. “성봉 씨는 어릴 때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이겨냈기 때문에 삶의 중심을 잘 잡을 것 같아요.” 사실 그렇지 않다. 내 내면엔 여전히 실패에 대한 불안, 사랑에 대한 결핍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전부 사람에게서 오는 감정들이다.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로부터 조금 더 자유로우려면 내면적으로 좀 더 유연해져야 한다.



사진출처:최성봉 홈페이지

 

 


 

 


"나에게 주어진 소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한 것이다"

 

윤한석치과의원 원장 윤한석


137,240시간. 영국의 역사학자 말콤 글래드웰은 자신의 저서 아웃라이어에서 한 분야에 1만 시간을 투자하면 누구나 그 분야에 전문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앞에서 언급한 시간은 그가 주장한 시간의 13배에 달한다.이 만큼의 시간을 쏟아부은 사람을 우리는 무엇이라 불러야 할까.

작은 동네 의사. 인사동에 위치한 윤한석 치과에서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스스로를 소박하게 소개했다. 하지만 한 쪽 벽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기술특허증과 자격증을 보고, 겸손의 표현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어떻게 반평생 가까이 자기의 업()을 묵묵히 감당해 올 수 있었을까? 한 분야의 장인으로서 업()에 대한 그의 철학을 들어보았다.

 


언제 치과 개업을 하셨습니까?

1970115일에 했습니다. 시간 참 빠르죠.

 

어디서 치과 공부를 했습니까?

서울 대학교에서 치과 공부를 했고, 서울대 치과 병원에서 인턴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했습니다.

 

50년 동안 진료를 해오셨는데 단골이 많을 것 같습니다.

신기하게도 한 번 오신 분들은 계속 와요. 저랑 나잇대가 비슷하거나 저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이 자주 와서 진료를 받습니다. 아무래도 비슷한 연령이니깐 제가 편한 것 같습니다.

 

환자에 대한 원칙이 있습니까?

최선을 다 하자입니다. 항상 교만함을 경계하고 환자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거죠. 그런 마음이 없다면 의사로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많은 의사가 환자를 돈으로 대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의술 활동이 물질에 영향을 받으면 올바른 진료를 계속하기 어렵습니다.

 

세계 각국에서 전시회를 열었다고 하는데?

한국인 최초로 독일의 무역 중심지인 뉘른베르크에 가서 치과 기술전시회를 열었습니다. 그다음 미국의 뉴욕, 스위스의 제네바 순으로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전문분야에 관해서 소개 부탁드려요.

틀니 제작이에요. 어태치먼트라고 잠재식 틀니가 있습니다. 그걸 제가 한국에서 최초로 개발했습니다. 과거에 틀니는 치아에 고리를 걸어서 끼웠다 뺐다 하면서 사용했습니다. 많이 불편했죠. 잠재식 틀니는 고리를 걸지 않고 대신 핀을 꽂아서 사용하는데, 훨씬 튼튼하고 사용하기도 편합니다.


 

관련 특허도 있습니까?

미국에서 세 개를 받았고, 일본에서 세 개, 독일에서 한 개, 한국에서 네 개. 총 열한 개를 받았습니다.

 

치과의사 중에 특허를 이렇게 많이 받은 사람은 못 봤습니다.

처음부터 특허를 내려고 생각하고 한 건 아니에요. 환자를 진료하다 보면 환자들이 무엇 때문에 불편해하는지 보입니다. 그럴 때마다 문제를 개선하려고 고민합니다. 그러다 보니 특허가 쌓이게 된 것 같습니다.

 

인생 철학이 있습니까?

베풀며 살 자입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달란트가 있습니다. 자기가 가진 재능을 가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보탬이 되는 삶을 살면 자신도 즐겁고 이웃들도 행복해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봐야지 없는 것만 보면 질투만 나고 욕심이 생겨서 쉽게 불행해집니다.

 

지금까지 진료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입니까?

체력 관리를 꾸준히 해왔습니다. 학생 때부터 사이클, 역도, 평행봉을 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운동습관이 진료에 많은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지금은 힘이 들어서 못 하고, 대신 많이 걷습니다. 식사 전에도 동네 한 바퀴 돌고 식사를 하고, 식당도 일부러 멀리 있는 곳을 갑니다.

 

건강한 치아를 유지하는 비결이 있다면?

주기적으로 치과에 가서 검사받는 게 좋습니다. 6개월에 한 번씩 가서 검사 받는 게 적당합니다. 치아는 건강의 척도입니다. 치아가 건강해야 음식을 잘 씹을 수 있고 소화할 수 있죠. 또 치아균형이 신체균형과도 연관이 있어서 주기적으로 관리를 잘해줘야 합니다.

 

앞으로 계획은 무엇입니까?

지금처럼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해 진료하면서, 사회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젊었을 때는 여기저기 봉사활동도 많이 다니고 후배 의사들을 위한 투자도 했는데, 앞으로는 환자에게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게 제 소명이고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환자에게 최선을 다하는 일이 사회와 국가에 기여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절망과 싸워 얻은 깨달음,

알면 저절로 건강해진다

  

건강독서모임 소장 백용학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일까. 10대 때는 힘이 센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20대 때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강한 사람에 대한 정의가 바뀌었다. 자기 신념을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 그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다.

닉 부이치치를 보라. 그는 태어날 때 사지가 없었다. 따돌림, 괴롭힘, 우울증은 늘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자살조차도 팔다리가 없는 그에겐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절망 대신 희망을 생각했다. 부정적 사고 대신 긍정적 사고를 선택했다. 결국, 지독한 절망을 자신의 신념으로 승화시켜 팔도 없고, 다리도 없고, 한계도 없다라는 메시지로 사람들을 절망에서 살려내고 있다.

우리 주변에는 누가 있을까. 건강독서모임 진행자 백용학 소장. 그에게도 신념이 있다. ‘알면 저절로 건강해진다.’ 이것은 그가 30년 동안 원인 모를 질병과 싸우면서 얻은 소중한 깨달음이다. 그는 건강독서모임을 통해 그 깨달음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있다. 그 메시지를 듣기 위해 서울 숲 IT 캐슬에서 그를 만났다.

 

 

어린 시절은 어땠나?

별명이 똥을 달고 다니는 아이였다. 그만큼 변보기가 어려웠다. 화장실에서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기도 했다. 항상 시름시름 아팠고, 어지러웠고, 정상적인 생활 자체가 불가능했다.

 

어릴 때 무슨 사고를 겪었나?

어머니께서 나를 임신하셨을 때 신경쇠약증이라는 병을 앓으셨다. 신경안정제 약을 드셨었는데, 나중에 당신이 태아에게 해가 되는 약이라는 것을 알고 나를 지우려고 하셨다. 다행히 나는 태어났지만, 아마 그 약 때문에 어릴 때부터 건강하지 못했던 것 같다.

 

병원을 찾아다녔나?

병원이란 병원은 다 찾아다녔다. 하지만 그동안 찾아간 의사들 모두 결국 나를 포기했다.

 

절망했을 것 같다.

희망이 없었다. 다행히 마지막 의사가 나에게 치료방법이 없다는 말과 함께 식이요법을 권장했다. 혹시 모르니 시도나 해보라고 하더라.

 

효과는 있었나?

짧은 시간에 효과를 보았다. 그 당시 장 무력증을 앓고 있었는데, 먹은 음식물을 소화를 못 시켰다. 그리고 변을 보면 피가 자주 났고, 심할 땐 의식을 잃기도 했다. 하지만 식이요법을 3개월 정도 하자 장 무력증은 자연스럽게 나았고, 변도 시원하게 보게 되었다.

 

어떤 식이요법이었나?

물을 자주 마셨다. 채소 위주의 식사를 했고, 유산균 음료를 사서 마셨다. 유산균 음료를 마시기 5분 전에 물을 마셨고, 음료를 마실 때 물과 함께 질경이가루를 함께 먹었다. 이것을 꾸준히 3개월 했다.

 

그 후로 건강을 되찾았나?

급한 불은 껐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건강을 되찾기 위해 자연치유 전문가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건강 서적은 언제부터 읽기 시작했나?

20살 때부터다. 그때 어떤 자연치유 전문가 집을 방문했는데, 집 한쪽 벽면에 건강 서적들이 빼곡했다. 그때나도 이분처럼 책을 많이 읽으면 건강해질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호기심이 생겼다. 그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깨달았다.

 

무엇을 깨달았나?

내가 약하게 태어난 원인이 어머니께서 복용하신 약에도 원인이 있지만, 그동안 내가 잘못된 식습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릴 때 과자를 많이 먹었다. 그리고 작은 질병에도 무조건 약을 먹었다. 또 자세도 좋지 않아 골반이 삐뚤어져 있었다. 그래서 신경이 눌려있었고, 신경이 눌려있으니 오장육부가 제대로 활동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플 수밖에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책은 몇 권 정도 읽었나?

건강도서뿐만 아니라 자기계발서, 심리학책, 논문, 사례집 등 다양하게 읽었다. 지금 서재에 책이 3,000권 정도 꽂혀있다.

 

건강서적들의 내용을 실험해 보면서 부작용은 없었나?

부작용은 없었다. 단지 효과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었다.

 

건강해지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나?

그동안 쌓였던 나쁜 습관 때문에 조금만 좋아지면 다시 옛날 식습관으로 돌아갔다. 그러면 다시 식습관 관리를 했다. 그렇게 좋아졌다, 나빠졌다 반복하면서 10년이 걸렸다. 제대로 했다면 더 빨리 좋아졌을 것이다.

 

건강독서모임은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나?

2009년에 나비 독서모임에 참석했다. 어느 날 자기계발 관련 도서목록들을 쭉 보는데 건강이 빠져있더라. 그래서 건강도서도 자기계발 도서목록에 포함하자고 건의했다. 상사 표정이 시큰 둥 했다. (웃음) 내가 그동안 겪은 일들을 말씀드렸더니 놀라면서 한번 해보라고 하더라. 그렇게 20101월에 국내 최초로 건강독서모임이 시작됐다.

 

 

독서모임을 진행하시면서 보람은?

셀 수 없다. 내가 깨달은 것을 나눌 수 있음에 감사하다. 많은 사람이 건강독서모임에 참여해서 건강을 되찾고 즐거운 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 힘이 난다. 그리고 2017년부터 아산시에 있는 학교들이 급식에 오분도미를 사용하기로 했다. 어떤 한 영양사가 내 강의를 듣고 아산시에 건의했는데 긍정적으로 검토된 것 같다. 기분이 좋다.

 

행복할 것 같다

꼭 그렇지 않다. 사실 건강독서모임을 진행하지 않으려고 했다. 경제적으로 힘이 들어 다른 일을 하기도 했는데, 이상하게 그때마다 몸이 아프더라. 그래서 물질적으로 조금 부족해도 지금 하는 일속에서 행복과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앞으로 계속 모임을 이끌어 나갈 것인가?

어릴 때 소년소녀가장으로 자랐다. 국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크면 어떻게 받은 것들을 돌려줄까 많이 생각했다. 지금 그 일을 하는 것 같다. 앞으로도 계속 이끌어 나갈 예정이다.

 

앞으로 목표는?

10년 안에 건강독서모임을 10만 명이 참여하는 사회운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개인을 넘어서 가정, 단체, 기업, 관공서, 학교에서 이 건강독서모임을 만들어서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면 좋겠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건강이 나빠지는 과정을 이해할 수 있게 되고, 병이 나기 전에 그 원인을 제거하고 건강한 삶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국민이 지금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지 않을까.

 



30, 대나무 뿌리 같은 인생


 

구두수선장인 박일등

  

대나무는 싹을 틔우기까지 오랜 시간 기다린다. 첫해, 둘째 해, 셋째 해, 넷째 해가 되어도 싹은 보이지 않는다. 다섯째 해가 되었을 때, 비로소 대나무는 싹을 틔운다. 그 후 대나무는 하루 60cm씩 빠르게 성장한다. 30일 정도 지나면 사람 키 10배가 되는 높이로 자라있다.

비밀은 뿌리에 있다. 대나무는 4년 동안, 오로지 뿌리만 내린다. 그 지루한 여정을 침묵으로 감내한다. 4년 동안 내린 뿌리 길이는 수십 미터에 달한다. 뿌리가 튼튼하니 순식간에 키가 자라는 것이다.

구두수선 30년 경력을 자랑하는 박일등 장인은 자신의 삶을 대나무 뿌리에 비유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사회 밑바닥에서 온갖 일을 겪었다. 껌팔이, 신문팔이, 구두닦이 등. 그에게 지난 30년은 뿌리를 내리는 혹독한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에서야 그 결실을 조금씩 보고 있다고 말한다.

 

언제 서울에 왔나

40년 전이니깐, 16살 때 올라왔다.

 

올라올 때 심정은 어땠나

처음엔 배불리 먹고 살려고 서울로 올라왔다. 그 당시는 밥 먹기가 힘들었다. 밥이라도 좀 잘 먹자는 생각이었다. 발품을 팔아 국수 공장에 취직 했다. 이제 배는 곪지 않겠구나 생각했는데, 사장이 국수를 못 먹게 하더라. 뒤에서 나를 철저히 감시했다. 그래서 국수 말릴 때 면이 하나씩 바닥에 떨어지면, 그거 주워 먹었다.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힘들었다. 어리다고 임금을 적게 주더라. 그래서 국수 공장에서 일 끝나면 고급식당을 다니면서 껌팔이, 신문팔이를 했다.

 

잠은 어디서 잤나

옛날에 불 때는 부엌 위에 다락이 하나 있었다. 짐을 넣어 두는 창고로 쓰였는데, 거기서 월세 5,000원 주고 살았다. 한번은 자고 일어났더니 복숭아뼈 부분에 피가 나 있더라.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다음날 보니 또 피가 나 있었다. 혹시나 해서 쥐덫을 놓았는데 그다음 날 쥐가 덫에 걸려있더라. 어린 나이에 그 좁은 공간에서 쥐가 살을 뜯어 먹는 줄도 모르고 쓰러지듯 잠을 잤다.

 

복싱도 했다고 들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프로 복싱선수 되면 명예도 얻고 돈도 벌 수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복싱을 시작했다. 매일 저녁 복싱연습을 했다. 81년도에 MBC 신인왕전이 열렸는데, 3위를 했다. 그때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몸이 삐쩍 말랐었는데도, “여기서 우승 못 하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링 위에 올랐다.

 

복싱을 왜 그만뒀나

그때 기록이 10전 때까지 1패였다. 10전이 넘어가면서 패가 쌓이기 시작했다. 전적이 올라가면 라운드 수도 올라간다. 처음엔 3라운드에서 경기하다가 나중엔 10라운드까지 뛰었다. 제대로 못 먹으니깐 라운드가 올라갈수록 체력적으로 한계가 드러나더라.

 

주위에서 아쉬워했을 것 같다

관장님도 다시 해보자고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먹고 사는 게 먼저였다. 관장이 먹고사는 문제까지 책임져 주지 않더라. 결국, 그만두었다. 하기 싫어서 그만둔 게 아니라, 나이가 차고 자아가 형성되니깐 미래에 대한 불안이 밀려오더라. 될까, 안 될까.

 

미련은?

지금 생각하면 미련이 많이 남는다. 그때 경험 때문에 지금은 운동이든 일이든 혼신의 힘을 다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온 힘을 다해야 실패해도 후회가 안 남는 것 같다.

 

구두수선은 언제부터 했는지

복싱을 시작하면서 했다. 국수 공장에서 일하니깐 복싱연습을 할 시간이 없더라. 그래서 국수 공장을 그만두고 구두닦이를 시작했다.

 

구두를 손으로 닦는다고 들었다

구두는 가죽으로 되어있다. 가죽도 피부다. 짐승 피부다. 보이지 않지만 사람 피부처럼 미세한 구멍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구두약을 바를 때 로션을 피부에 바르듯 손으로 구두에 여러 번 문질러야 광이 잘 난다. 30년 동안 구두를 닦으면서 터득한 노하우다.

 

오랫동안 구두수선을 하셨는데, 구두 철학이 있나

철학이라기보다는 작은 깨달음은 있다. 내가 10년 전에 구두를 닦을 때 하루에 3만 원도 못 벌었다. 그때 어떤 책을 봤는데 돈을 좇아가지 말고, 돈이 따라오게 하라는 구절이 있더라. 무슨 말인지 제대로 몰랐다. 시간이 지나고 구두를 닦으면서 그 답을 얻었다. “덕을 베풀며 살자.”

 

구체적으로 이야기해 달라

기억으로 그때가 5월이었다. 여름을 재촉하는 달. 5월만 돼도 샌들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 당시 샌들 끈이 떨어지면 수선비로 2천 원을 받았는데, 그게 마음에 걸리더라. 손이 많이 가지도 않고 해서 무료로 해줬다. 3개월이 지나자 매출이 3배로 늘었다. 하루 3만 원도 못 벌었는데, 그해 가을에는 10만 원을 벌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우리 가게에서 샌들을 수선받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당신의 아들, 딸에게 나를 소개했다. “박일등구두수선소에서 무료로 샌들 끈을 고쳐줬어. 앞으로 신발 떨어지면 거기 가서 신발 수선해라고. (웃음)

 

30년 동안 구두를 수선해오면서 아쉬움이 있다면

공부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 구두를 수선하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하는데, 배운 것이 많이 없으니깐 대화가 잘 안 되더라. 아내도 나에게 검정고시를 쳐보라고 권하더라. 늦게나마 구두 수선하면서 공부를 했는데 감사하게도 합격했다.

 

늦은 나이에 힘들지 않았는지

엄청 힘들었다. 나이 50이 되니깐 어제 본 문제인데, 다음날 자고 나면 기억이 안 난다. 모르는 문제를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지나가는 고등학생을 잡고 루트가 뭐냐고 무작정 물어보기도 했다. 근데 학생들도 모르더라. (웃음) 그냥 혼자서 반복해서 보는 수밖에 없었다. 반복해서 봐도 이해가 안 되면 문제와 답을 외워버렸다.

 

주변 반응은 어땠나

응원해 주는 사람도 있었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내 친구 중에 현대자동차 유럽지사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녀석이 있다. 그 친구가 내 이야기를 듣고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내기하자고 했다. “내가 합격하면 나에게 500만 원을 주고, 불합격하면 내가 너에게 500만 원을 준다.”라고. 내기에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더 이를 악물고 공부했다.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가

어머니께 좀 더 효도 하고 싶다. 어린 나이에 서울로 올라와 돈 번다고 어머니를 제대로 모시지 못했다. 지금 어머니 연세가 80이다. 완도에 계시는데, 그동안 서울구경 한번 못 시켜드렸다. 올여름 1주일간 가게 문을 닫고,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구경을 시켜드릴 계획이다.

 

 


방황과 문제는

내 인생의 또 다른 소스


오픈튜토리얼스 개발자 이고잉


우리는 갖지 못한 것을 바라볼 때마다 저것이 내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결핍을 인지하며 불행함을 느낀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행복한 삶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학습에도 적용할 수 있을까? <오픈튜토리얼스> 운영자인 이고잉은 그렇다고 대답한다. 코딩을 공부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그의 이름을 들어 봤을 것이다. 그의 이력은 독특하다. 고등학생 때, 그는 마냥 책을 좋아하던 문학 소년이었다. 대학도 국문과로 진학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하던 중, 프로그래밍 세계를 접하게 되고 IT분야로 진로를 바꾼다.

현재 그는 개발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여전히 가슴 속에는 인간, , 자연에 대한 애착과 질문이 존재한다. 그가 만든 프로그램과 코딩강의에 스며있는 인문학적 사유의 잔향들이 그 증거다. <오픈튜토리얼스>에서는 개발능력이 없는 사람도 누구나 자신의 강좌를 개설해서 공유할 수 있다. 공동공부 기능을 이용하여 같이 공부하고 있는 사람들을 확인하고, 소통할 수 있다. 그는 무슨 목적으로 이 플랫폼을 개발했을까?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나 그의 삶과 개발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실명 대신 이고잉이라는 필명을 사용하는데 이유가 있나?

옛날 블로그 시절 때부터 썼던 닉네임이다. 편해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데 별 뜻은 없다.

 

문과대학에서 코딩을 배운 계기는?

대학교 1학년 때 교양 수업으로 HTML 수업을 들었다. 그 수업이 끝날 때쯤, 학과 교수님께서 나에게 학과 홈페이지를 만들어 보라고 하셨다. 짧게 배운 지식으로 홈페이지를 완성하고 나니 학과 사람들이 칭찬해 주더라. 그때 그 경험이 코딩공부를 하는데 동기부여가 되었다.

 

프로그래밍 지식이 없었을 텐데 힘들지 않았나?

오히려 즐거웠다. 그 당시에는 웹 페이지 구현이 간단했다. CSS, 자바스크립트, JQuery를 몰라도 웹을 만들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만 공부해도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니 좋은 시절이었던 것 같다. (웃음)

 

그 후로 계속 코딩을 공부했나?

군대 제대 후, 플래시를 공부하러 디자인 학원을 등록했다. 수료하기 전, 학원에서 개인 프로젝트를 주더라. 1주일 정도 시간을 줬는데, 나는 6개월이 걸렸다. 같은 동기들은 1주일 만에 프로젝트를 완성했다. 모두 졸업하고 취직을 했는데, 나만 혼자 남아서 마무리를 했다.

 

6개월이나 걸린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에 간단한 사진편집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만들어 놓고 보니 부족한 부분이 보이더라. 부족한 부분을 채워 넣고 보니 또 부족한 부분이 보였다. 완성하고 수정하고를 반복하다 보니 6개월이 걸렸다.

 

실력이 많이 늘었을 것 같다

실력도 많이 늘었지만, 한계도 체험했다. 그 당시 내가 만든 프로그램 용량이 200MB 정도 됐다. 소스코드가 너무 복잡해졌다. 한 곳을 바꾸면 다른 곳에서 문제가 생겼다. 그때 마음에 갈등이 생기더라. 정말 바꾸고 싶다는 진보적인 생각과 바꾸면 더 복잡해지니깐 그만두자는 보수성이 맞서더라.

 

한계를 어떻게 극복했나?

객체지향을 공부하고 싶어서 자바 학원을 등록했다. 내가 짠 소스코드를 좀 더 단순화하고 싶었다. 6개월간 객체지향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청주 집에 내려갔다.

 

본가에서 무엇을 했는가?

앞에서 말한 이미지편집프로그램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혼자서 개발했다.

 

어떤 프로그램인가?

이미지를 웹에 올리면 플래시로 예쁘게 만들어 준다. 이미지 파일을 관리도 해주고, 예쁘게 편집도 해준다. 사진으로 사용자들끼리 소통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하루 몇 시간씩 개발했나?

아침에 프로젝트 생각을 하면서 깬다. 오전에는 프로젝트를 개발하고, 점심 먹고 뒷산에 가서 운동하고, 오후에는 디자인했다. 저녁에는 기획과 사용자들 반응체크를 했다. 1년을 그렇게 생활했다.

 

혼자서 외로웠을 것 같다

처음부터 혼자 진행을 했기 때문에 외롭진 않았다. 아버지께서 지지를 많이 해주셨다. 산에 오를 때 늘 아버지와 함께했다. 아버지와 운동도 하고 내가 개발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관해서 이야기도 해드렸다. 신기하게도 아버지는 컴맹이었지만 다 이해하시더라. (웃음) 관심의 힘인 것 같다.

 

코딩강좌를 무료로 서비스하고 있다. 심지어 광고도 없다

시대의 변화인 것 같다. 옛날에는 많은 동영상을 서비스하는데 시간과 비용이 들었다. 지금은 유튜브 같은 플랫폼에 올리기만 하면 되니깐 간편하고 제작비용도 안 든다. 광고 자체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광고로 인해서 학생들 시선이 분산되어서 싫다. 그래서 광고수익이 0이다.(웃음)

 

코딩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강조하는 메시지가 있다면?

두 가지를 이야기한다. 첫째는 본전이다. 시간을 공부하면 한 시간짜리 본전이 된다.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 이 정도 본전을 가지고 있다면 쉽게 포기하게 된다. 만약 누군가 6개월 동안 시간을 투자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었다면, 큰 문제를 만났다고 쉽게 포기해 버릴까? 그는 끝까지 해내고 만다. 그는 6개월짜리 본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에 대한 소중함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만들기에 이미 많은 것을 배웠음에도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낀다. 어느 하나를 배웠으면 그것을 더 공고히 해야 하는데, 조급한 마음에 다음 단계로 넘어가 버린다. 이렇게 하면 전에 배운 내용도, 앞으로 배울 내용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없다. 결국, 좌절감과 결핍만 남는다.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소중히 여기고, 작더라도 배운 내용으로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봐야 한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는 다 어렵다. 그리고 해답은 여러 개일 수 있다. 심지어 없을 때도 많다. 하지만 우리는 학교 다닐 때처럼 단 하나의 정답을 찾으려고 한다. 지금 내 머릿속에는 1년째 고민하는 문제가 있고, 5년째 고민하는 문제가 있다. 이 문제들을 언제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 문제들이 내 인생을 더 맛깔나게 만들어줄 소스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앞으로 즐거운 고민을 계속할 것이다.

코딩도 마찬가지다. 하나의 정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구글링이나 책을 통해서 다양한 각도로 문제에 접근해보고,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야 한다. 해답을 못 찾더라도, 그 과정에서 코딩 실력은 늘어나고, 문제를 보는 시야도 커질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한 마디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나는 방황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한다. 우리 삶은 방황하는 시간이라는 거대한 바다로 가득 차 있다. 나머지 시간은 그 위에 드문드문 존재하는 섬과 같다. 쉽게 말하면, 방황은 사춘기처럼 어떤 특정 시기에 하는 것이 아니라, 평생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방황을 빨리 벗어나려고 하지 않고, 평생 함께할 동반자로 여긴다. 방황을 긍정하자. 그 안에서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가면 좋겠다.

 


  1. 영덕대게 태흥 2017.03.11 19:32 신고

    자신이 공부한 내용을 소중히 여기고, 작더라도 배운 내용으로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만들어 봐야 한다라는 말이 와닿네요
    좋은 인터뷰 글 잘 읽고 갑니다:)


나의 특별한 재능은 무슨 일이 있어도 실행하는 나의 자발성이다.” <내 안의 잠든 거인을 깨워라>의 저자 앤서니 라빈스는 자발성을 특별한 능력으로 표현했다. 인간은 누구나 자발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삶을 살아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특히 대한민국 입시제도 아래 누구나 똑같은 매일을 강요받는 고등학생들에게 자발성이라는 단어는 매우 어렵기만 하다.

그런데도 스스로 하고 싶어 하는 것을 찾고, 자발적으로 행동하는 학생들이 있다. 선린인터넷고등학교 5명의 학생으로 구성된 비트바이트 팀이 그 주인공이다. 비트바이트 팀은 학업을 병행하면서 바른말 교육 애플리케이션 바른말 키패드를 개발해 10대들의 비속어 문화를 개선해 나가고 있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 삼성투모로우 솔루션에서 아이디어 부문, 임팩트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간단한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비트바이트 팀 대표 안서형 입니다. 선린인터넷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고요. 다음 달에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수능이 끝나도 많이 바쁠 것 같아요.

바른말 키패드사용자들이 보내주신 불편한 점들을 계속 개선해 나가는 중이에요. 다음 달에는 아이폰 버전도 출시할 계획이라서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코딩은 언제부터 배웠나요?

2 때 정보 영재교육원에서 1년 동안 잠깐 배운 적은 있는데 깊이 배우지는 못했어요. 코딩에 맛만 보는 정도였어요. 배운 지식으로 응용도 못 했고요. 본격적으로 고등학교 들어와서 코딩을 배웠어요.

 

바른말 키패드를 개발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처음부터 비장한 각오는 없었어요. 20014년 삼성 프로젝트 멘토링에 참여를 하려고 애플리케이션 기획을 시작했어요. 팀원 중 한 명이 비속어 사용을 줄이는 앱을 만들어보자고 아이디어를 냈는데, 팀원들 반응이 다 좋았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팀 명이 비트바이트인데 무슨 뜻인가요?

컴퓨터 용량의 최소 단위를 비트라고 하는데요. 비트가 어느 정도 모이면 단위가 바이트로 변해요. 조금 더 큰 단위가 되죠. 아주 작은 비트가 모여 더 큰 바이트가 되듯이, 우리의 작은 노력이 모여 큰 결실을 이루자는 뜻으로 지었습니다.

 

학교 공부와 개발을 병행하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아요.

그게 제일 힘들었어요. 저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못해요. 다른 친구들은 멀티태스킹이 가능한데 저는 한 가지에만 집중할 수 있어요. 또 학교 수업 내용과 개발에 필요한 프로그래밍 언어들이 100% 일치하지 않아서 어려움이 컸어요. 앱 개발은 2학년 때 배우지 않고 3학년 때부터 배우거든요. 그래서 바른말 키패드를 개발하기 위해서 안드로이드를 따로 독학했어요. 모르는 건 팀원들과 풀어나갔고요.

 

열악한 환경이었는데 어떻게 개발을 지속 할 수 있었나요?

처음에는 공모전이라는 목표에서 시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의 언어 습관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또 개발 중에 여러 사람으로부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니깐 아, 내가 지금 하는 일이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니깐 힘들어도 계속하게 되더라고요.

 

일과는 어떻게 되나요?

아침 830분부터 410분까지 학교수업을 들어요. 점심시간에 노트북 사용이 가능해서 점심을 빨리 먹고 짬 내서 개발할 때도 있어요. 학교 수업이 끝나면 팀원들과 모여서 개발을 계속하거나 아니면 집에 가서 개발하거나 그래요. 잠은 12시 이전에 자려고 하는데, 개발 일정이 늦어지면 밤샘 작업을 해야 해서 쉽지 않죠.

 

학교에서 맘 놓고 개발을 할 수 있게 지원을 많이 해주나요?

물질적인 것 보다는 정신적인 부분에서 많은 도움을 받아요. 일단 학교 분위기가 자유로운 편이에요. 복장도 자유 복장이고 전자기기도 자유롭게 사용 가능해요. 또 저희 학과장 선생님께서 지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 주세요. 발표가 있을 때도 항상 참석하셔서 응원해 주시고요. 옆에서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는 것 같아요.

 

개발 과정에서 재미난 에피소드가 있다면?

저는 비속어에 대해서 매우 조심스러운 편이에요. 어쩌다가 욕이 입 밖으로 나오면 그날은 죄챔감에 잠을 못 잘 정도예요. 그런데 개발하면서 욕이란 욕은 다 배운 것 같아요. 앱 작동 방식이 사용자가 욕을 입력하면 해당 욕이 이모티콘으로 변경되는 방식이라서, 사람들이 사용할 것 같은 욕을 다 찾고 직접 타이핑도 해야 됐어요. 그 과정에서 욕에 대해서 무감각해졌다고 할까요? (웃음)

 

앱 출시 후 학생들과 학부모들로부터 어떤 피드백을 받았나요?

감사하게도 피드백을 많이 보내주세요. 지금도 하루에 메일이 10통 이상씩 와요. 내용은 크게 두 종류인 것 같아요. “유용한 앱을 만들어 주어서 감사합니다. 바른말 키패드 앱 덕분에 비속어 사용이 줄었어요.” 같은 내용이고요. 또 하나는 앱 기능 중에 개선할 부분들에 대한 거예요. 불편한 점이나 문제점에 대한 내용도 많죠.

 

보람을 느낄 때는 언제인가요?

사람들이 제가 만든 앱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고, 꾸준히 관심을 주세요. 또 감사하다는 말을 들을 때 개발자로서 정말 행복하고 보람을 느껴요.

 

앞으로의 계획은?

지금까지는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데 개발 초점을 맞췄어요. 하지만 내년부터는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어서 수익창출에 초점을 맞추려고 해요. 바른말 키패드는 무료로 계속 서비스를 유지할 것이고요. 수익을 낼 수 있는 다른 사업아이템을 찾아봐야죠. (웃음)


내가 행복하게 해준다고 기다리랬잖아. 내가 정상에 설 때까지 기다리랬잖아.” 래퍼 드렁큰타이거는 할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슬픔을 달래기 위해 8:45 Haven 이 노래를 만들었다. 랩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한 번쯤 노래방에서 리듬에 몸을 들썩이며 불러봤을 것이다.

하지만 복싱링 위에 오를 때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의식처럼 가사를 따라 하는 한 젊은이가 있다. 대전대 사회체육학부에서 복싱훈련을 하는 배영식(20) 군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최근 대통령 배 복싱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국가대표 선발전을 위해 맹연습 중인 그를 만나보았다.

 

안녕하세요. 독자들에게 간단하게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대전대학교 1학년 사회체육학과에 재학 중인 배영식이라고 합니다.

 

권투를 언제 처음으로 시작했나요?

중학생 때 처음으로 복싱을 시작했어요. 서산 서령중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일 때 처음으로 학교에 복싱부가 생겼어요. 그때 복싱부 관장님께서 집으로 찾아오셔서 같이 복싱을 해보자고 권유를 하셨죠. 처음엔 하기 싫었는데 관장님께서 계속 권하셔서 시작하게 됐어요. 그 당시에 저뿐만 아니라 우리 집 식구들 대부분 복싱을 시작했는데 마지막엔 거의 저 혼자 남았어요. (웃음)

 


식구들이면 같이 지내던 친구들을 말하는 건가요?

그 당시 같이 살던 형 동생들이에요.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보육기관에서 자랐어요. 무슨 이유인지 잘 모르겠지만, 부모님께서 저를 낳으시고 멀리 떠나셨어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보육원에서 저랑 상황이 비슷한 친구들하고 같이 지냈어요.

 

어린 나이에 아주 힘드셨겠어요.

어릴 때는 부모님께서 왜 저를 떠나셨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많이 혼란스러웠죠. 그리고 다른 친구들은 부모님 밑에서 따뜻한 밥 먹고 사랑받으며 지내는데 나는 왜 이런 상황에 놓였을까 생각할 때마다 부모님이 원망스럽기도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괜찮아졌어요. 시간이 많이 지나서 괜찮아진 건지 아니면 권투를 하면서 그런 감정들이 어느 정도 회복됐는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괜찮아요.

 

지금도 부모님을 찾고 계신 건가요?

. 사실 지금 제 부모님의 생사도 잘 몰라요. 얼굴도 모르고요. 그래도 찾아야죠. 저를 낳아주신 분인데.

 


권투를 하는 이유도 부모님 때문인가요?

권투로 성공해서 유명해지고 싶어요. 유명해지면 그때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가끔 TV에 보면 운동선수 중에 어릴 때 해외로 입양 보내졌다가 다시 유명해진 후에 부모님을 찾는 사람이 있잖아요. 저도 유명해지면 TV나 여러 매체를 통해서 제 얼굴이 알려질 거니깐 그땐 더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링 위에 오를 때마다 드렁큰타이거의 8:45 Haven을 듣는 이유가 있나요?

거기 가사 중에 내가 행복하게 해준다고 기다리랬잖아. 내가 정상에 설 때까지 기다리랬잖아.” 라는 가사가 있어요. 드렁큰타이거가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고 나서 지은 곡인데 저의 상황과 비슷해서 많이 공감돼요. 그리고 노래를 들으면서 어디 계신지 모르는 부모님께 다짐도 해요. 내가 성공해서 꼭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요. 그러면 긴장도 풀리고, 힘도 생기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영식 군에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 계신가요?

성남보육원에서 근무하시는 박강분 선생님이에요. 어릴 때부터 저를 도와주셨어요. 제가 복싱훈련 하면서 슬럼프가 오거나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옆에서 많은 격려와 위로를 해주셨어요. 치킨이나 맛있는 음식 사주시면서 같이 해보자고, 할 수 있다고 다독여 주셨는데 지금까지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도 제 밑에 같이 운동하는 후배들이 있어요. 복싱 훈련이 워낙 힘들다 보니깐 도중에 그만두려고 하는 후배들이 가끔 생겨요. 그때마다 저도 선생님처럼 후배들 맛있는 거 사주면서 같이 해보자고 잡아주곤 해요(웃음)

 


복싱훈련은 어떻게 하시나요?

훈련은 새벽부터 시작해요. 새벽 550분에 기상해서 1시간 30분 정도 달려요. 그리고 오전에 웨이트 트레이닝 1시간 정도 하고 오후에 줄넘기, 샌드백 치기, 스파링, 체력훈련을 3시간 정도 하고요. 시합이 있을 때는 조금 더 하고요.

 

앞으로 어떤 계획을 하고 있나요?

11월에 복싱 국가대표 선발전이 있어요. 우선 태극마크를 목표로 최선을 다하려고요. 독자들이 이 잡지를 볼 때쯤 결과가 발표됐을 수 있겠네요.(웃음) 먼 미래에 제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는 잘 몰라요. 하지만 순간마다 눈앞의 목표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하면 어느새 제가 상상하던 복싱선수가 되어있을 것 같아요. 물론 부모님도 찾고요.

 



만약 내일이 내 삶의 마지막이라 해도, 나는 지금 하는 이 일을 계속할 것인가?” 애플 창업자 고 스티브 잡스는 대학생 때부터 이 철학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지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질문에 ‘yes’라고 대답을 못 했을 때 그는 지금 하는 일을 과감히 그만두었다. 잡스가 스무 살 때 리드칼리지에 입학 후, 학교 커리큘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자 자퇴한 일은 유명하다.


한국에도 스티브 잡스 같은 사람이 있다. 정신과 전문의 자리를 박차고 나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직접 찾아다니며 무료상담을 해주는 행복키우미 임재영 상담가다. 정신과 전문의 일을 할 때 그의 연봉은 소리 날 정도로 높았다. 하지만 그는 정신과 전문의가 되고 3년 후 스티브 잡스처럼 전문의 자리를 떠났다. 15년간 시간과 땀을 들여 의사가 됐는데, 의사라는 직업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일까?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듣기 위해 116일 계원예술 대학에서 그를 만났다.

 

 

15년 동안 준비해서 힘들게 정신과 전문의라는 꿈을 이루었는데 어떻게 그만두게 되셨나요?

대학교 원서를 넣을 때 성적에 맞춰서 과를 선택했어요. 그때 성적이 잘 나왔거든요. (웃음) 그리고 많은 돈을 벌고 싶었어요. 하지만 15년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상담을 하면서 돈이 인생의 행복을 결정하는 키가 아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레지던트를 수료하고 처음 정신과 전문의가 됐을 때 너무나 감격스러웠죠. 그리고 첫 달에 통장에 천만 원이 찍힌 것을 봤을 때 심장이 쿵쾅거렸어요. 하지만 이 감격도 오래 못 가더라고요. 두 달 정도 지나니깐 큰돈인데도 아무런 감흥이 없는 거예요.

그때부터 나는 어떤 정신과 전문의가 될까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정신과 전문의가 되는 것만 생각했지 정신과 전문의가 된 후의 모습은 구체적으로 그려보지 못했거든요. 그 과정에서 병원을 나오자고 결심했어요.

 



구체적으로 생각한 의사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인간미가 넘치는 의사예요. 흰 가운을 입고 뒷짐 지고 근엄한 모습을 한 의사가 아니라, 낮은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서 도와주고 그들과 친구가 되는 의사예요.

병원에 있으면 저보다 나이 많으신 분들도 저에게 선생님 하시며 허리 숙여 인사를 하시는데, 제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교만함이죠. 그런데 행복에 대한 가치관이 바뀌고 나니깐 이 기분이 저를 불편하게 하더라고요.

또 병원에 있으면 사람을 만나는 데 한계가 있어요. 가난한 사람, 소외된 사람은 만나기 힘들어요. 거의 불가능하죠. 당장 생존을 위한 돈도 없는데, 정신과 치료를 위해 쓸 돈이 어디 있겠어요. 그래서 병원을 나가기로 했어요.

 

그런 일들은 병원을 나오지 않고도 하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맞아요. 방금 말씀드린 일들은 병원을 나오지 않고도 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사실 제가 병원을 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제 말과 행동의 불일치 때문이에요.

제가 환자들에게 늘 살아가는 데 돈은 필요하지만, 돈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다. 너무 돈을 좇느라 소중한 것들을 놓치지 마세요.”라는 조언을 해요. 그런데 어느 순간 환자들이 당신은 한 달에 천만 원씩 벌면서, 돈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정말 그런 거예요. “돈이 많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에게 돈이 전부는 아니다라고 말하면 누가 듣겠어요? 그 생각을 하니깐 저 자신이 모순덩어리로 보이고 위선자로 보이더라고요. 그리고 부모님과 장인·장모님께 제 속 이야기를 다 말씀드렸어요. 아내에게도 모두 털어놨죠.

 



양가 어른들과 아내께서 흔쾌히 허락을 해주셨나요?

양가 어른들은 제 생각을 들으시고는 믿고 지지해 주셨어요. 아버지께서는 조금 걱정하시기는 했지만 제 생각을 존중해주셨고요. 아내는 제가 천천히 설득했어요. 설득이라기보다 제가 그동안 느꼈고 깨달은 것들을 솔직히 다 이야기를 했어요. 그리고 아내의 동의를 구했죠. 아내가 만약 반대했다면 저는 지금 하는 이 일을 못 했을 거예요. 그러면 또 제가 모순적인 사람이 되거든요(웃음). 밖에서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 마음을 치료해준다면서 집에서는 아내에게 상처를 주는 게 되잖아요. 제일 행복해야 할 사람이 아내고 제 가족인데 만약 제가 하는 일 때문에 불편함을 느끼고 힘들어한다면 저는 그게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해도 못 해요.

 

수입이 전보다 확 줄었을 텐데 심리적인 부담은 없나요?

아직은 없어요.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데 저는 돈에 크게 신경을 안 써요. 물질적인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저 자신이 돈에 대한 집요한 마음이 없어요. 강의를 가도 강의비를 주시면 받고 안 주시면 그만이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강의를 요청해주셔서 제가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제가 감사한 거죠. 아내는 다를 거예요. 아무래도 가정을 운영해 나가려면 어느 정도 비용이 들어가니깐요. 그래서 늘 아내에게 고맙고 또 한편으로 미안해요.

 

지금의 결정에 후회한 적이 있나요?

후회라기보다 가끔 외로워요. 특히 막 시작했을 때는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었어요. 하루에 한 명도 못 만난 적도 있었어요. 그때는 많이 막막했죠. 제가 처음 가졌던 기대와 아주 달랐거든요. 제가 찾아가는 고민 상담소 차를 타고 여기저기 다니면 많은 사람이 고민 상담을 요청해 올 줄 알았어요. 제 착각이었죠. 그런 생각도 저의 교만함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내 안에 아직 교만한 마음이 남아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녔어요. 명함을 만들어서 지하철역에서 뿌리기도 했고, SNS계정을 만들어서 홍보도 했죠. 그 과정에서 제 높은 마음이 참 많이 깎이고 다듬어졌어요. 병원 있으면 사람들이 먼저 찾아와서 인사하고 말을 걸어 줬는데 지금은 제가 먼저 다가가서 인사드려도 본 척도 안 하는 사람도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명함을 제 앞에서 버리기도 해요. 그런 모습 보면 가슴이 아파요.

 


앞으로 이 일을 계속하실 건가요?

계속해야죠. 제 삶의 이유이고 목적인데요. 제가 살아 있을 동안 한국의 자살률을 조금이라도 낮추고 싶어요. 저의 이 작은 노력으로 인해 한 사람이라도 조금 더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10년 넘게 자살률 1위인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게 많이 부끄럽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겁기도 해요.

 

지금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격려의 한마디 부탁드려요.

누구나 힘들 때 나 하나 없어진대도 슬퍼할 사람 없을 거야라는 생각을 해요. 하지만 저희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슬퍼해요. 신문이나 뉴스에서 자살 소식을 들을 때마다 괜히 나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더 무거워요.

그리고 주변에 자신의 고민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건 착각이에요. 주변에 없을지는 몰라도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왜냐면 저희 같은 사람들이 있거든요. 또 지역마다 정신 보건센터가 있어요. 사람들이 보건소는 알고 있는데 정신보건센터는 모르거든요. 게다가 상담비용도 무료에요. 그리고 진료기록도 안 남구요. 그러니깐 고민이나 힘든 일이 있으면 혼자 앓지 말고 꼭 주변 사람이나 아니면 지역 정신보건센터로 연락을 주세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항상 기다리고 있어요.

 

 


한류 열풍 때문인지 한국드라마를 보고 한국행을 결심하는 중국인들이 늘어나고 있다. 중국묘족 방송인 강미려 씨도 그중 한 사람이다. 그녀는 중학생 때 처음 <가을동화>를 보고 한국에 대한 기대를 품었다. 그리고 대학원생 때 교환학생프로그램으로 처음 한국에 발을 디뎠다. 미려 씨는 그 당시를 한국에 오면 모든 것이 드라마처럼 이루어 질 줄 알았는데 현실은 정말 힘들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묘족 특유의 쾌활함과 긍정적인 마음으로 장애물들을 하나씩 극복하고 지금은 한국에서 <이슈를 말한다>, <여유만만>, <핫 플레이스 코리아> 등 다양한 방송분야에서 종횡무진하며 활약하고 있다. 117일 종로 익선동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나보았다.

 

간단한 소개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저는 한국에서 MC, 리포터, 배우 등 다양한 방송활동을 하고 있는 중국묘족 방송인 강미려라고 합니다.

 



묘족은 어떤 민족인가요?

묘족은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에요. 주로 중국의 남부인 귀주성에 가면 많이 볼 수 있어요. 피에스타의 차오루 언니도 저와 같은 묘족이에요. 보시면 알겠지만 성격이 매우 쾌활하고 밝아요. 또 묘족은 술과 음악을 매우 사랑해요. 축제나 절기 이외에도 일상에서 음주·가무를 즐기는 편이에요. 술을 좋아해서 술의 종류도 단 술, 약술 등 다양하고요. 그리고 종종 술을 권할 때 노래를 부르기도 해요(웃음)

 

정말 한국 드라마 <가을동화>를 보고 한국행을 결심하셨나요?

중학교 때 처음으로 한국드라마를 봤는데 그게 <가을동화>였어요. 그때는 어렸고 또 감수성이 예민할 때라 드라마 속 모든 장면이 다 아름답게 보였어요. 한국 사람도 전부 친절하고 따뜻해 보였고요. 특히 한국드라마 속 남자들이 엄청 멋있게 보였어요. 한 여자를 위해 목숨까지 거는 남자를 보고 누가 안 좋아하겠어요.(웃음) 그때부터 가족과 친구들에게 나 커서 꼭 한국 갈 거다라고 말하고 다녔어요.

 

대학원생 때 처음 한국을 방문했는데 어떠셨나요?

처음에는 정말 기쁘고 좋았어요. 한국에 오자마자 강릉 속초로 갔어요. 거기가 <가을동화> 촬영지였거든요. 가서 드라마 속 주인공이 살았던 집도 보고, 함께 걸었던 바다도 구경했어요. 정말 꿈만 같았죠. 그런데 한국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경험을 해보니 어디를 가나 좋은 사람이 있으면 나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죠. 한국에서 사람에게 속아보기도 하고, 상처도 받아 봤어요. 그러면서 현실을 직시하게 된 것 같아요.

 


방송일은 한국에 와서 시작하신 건가요?

중국에 있을 때부터 시작했어요. 중국 귀주방송국에서 인턴으로 근무한 적이 있어요. 그때 MC, 작가로 활동 했어요. 그 당시 저는 여행프로그램을 맡았는데 기획과 제작에도 참여했고요. 놀라운 건 그 프로그램이 2010년 귀주성 우수 프로그램으로 상을 받았어요. 그때 기분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 일을 계기로 앞으로 방송 일을 계속해야겠다고 다짐했어요.

 

한국에서는 어떻게 방송 일을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영남대 대학원 교환학생 때였어요. 9월에 학교가 방학을 했는데, 방학 때 보통 시간이 많이 남잖아요? 한국에서도 방송 일을 해볼까하는 생각을 했어요. 중국에서도 했는데 한국에서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그때 이력서 한 장 들고 서울로 올라갔어요. KBS방송국부터 시작해서 크고 작은 방송국에 이력서를 무작정 넣었어요. 채용 기간도 아닌데 담당자를 찾아가서 제 소개를 하고 이력서 한번 봐달라고 부탁드렸죠. 그때는 무슨 생각으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어요.(웃음) 다행히 인민왕에서 연락이 왔어요. 인민왕부장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셨는지 다음 주부터 바로 같이 일을 시작해보자고 하셨어요. , 정말 그 소리를 들었을 때는 정말 감격스러웠어요. 정말 잊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다음 주부터 바로 인민왕에서 리포터 일을 시작하게 됐어요.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이 있나요?

KTV에서 제작한 <핫 플레이스 코리아>라는 여행프로그램이 있어요. 한국 구석구석 숨어있는 관광명소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었는데, 7개월간 리포터로 일하면서 한국의 다양한 여행지를 다녔어요. 태백에서 촬영했을 때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그때가 한겨울이었어요. 기온이 영하 10도를 밑도는 데서 촬영을 했는데, 옷을 좀 따뜻하게 입으면 화면에 너무 뚱뚱하게 나오고, 얇게 입으면 너무 춥고요. 결국엔 따뜻함을 포기하고 영상의 퀄리티를 선택했어요(웃음) 추워서 벌벌 떨다가도 카메라만 앞에 보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차게 진행을 했어요. 촬영 끝나고 PD님과 제작진들이 고생했다며 난로와 패딩, 핫 팩 등을 가져다주셨는데 그때 아 살았구나라는 생각을 했죠. (웃음)

 


한국의 방송제작 환경과 중국의 방송제작 환경의 차이점이 있나요?

한국에서 방송 일을 하면서 놀란 점은 내일 촬영인데 오늘 대본을 준다는 거예요. 중국은 한 프로그램을 기획하면 일정 시간을 두고 여유롭게 촬영을 해요. 드라마도 미리 제작을 다 해놓은 다음에 방영하기 때문에 배우들이 충분히 대본을 숙지할 수 있죠. 그런데 한국은 미리 제작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때그때 찍고 방영을 하는 것 같아요.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이 됐는데 처음에는 너무 적응이 안 돼서 애먹은 적이 많아요.

 

앞으로 어떤 계획이 있으신가요?

지금 한국에서 MC, 성우, 리포터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이제는 영역을 조금 더 좁혀서 저의 전문 분야를 만들고 싶어요. 여러 가지 할 수 있다는 점이 좋기는 한데 전문성을 키우기에는 한계가 있거든요. 그래서 앞으로 저만의 전문성을 더욱 키울 거예요.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연기도 해보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선 더 노력해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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